[삶의 향기] 흑백의 '판단’을 넘어
무지갯빛 '사유’의 세계로
[중앙일보] 입력 2017.12.02 01:33 |
맥 빠지게 만드는 5지선다형
강의 평가서
내 글쓰기의 비결은 '판단’이 아니라 '사유’
몇 년 전부터 인문학 강연이
끝날 때마다 스태프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러분, 나가실
때 반드시 설문조사에 참여해 주세요. 강의에 대한 평가 문항입니다.”
두 시간 가까이 목이 터져라 강의하고 나서 가장 먼저 들리는 소리가 '이 강의를 평가하라’는 명령어일 때, 다리에 힘이 쭉 풀리고 만다. 만족도를 1에서 5로
나누어 평가하는 수치상의 평가서를 작성하기 위해 내 강의를 들으러 오신 것은 아닐 텐데. 행정상 편의를
위한 설문조사겠지만 막상 강의에 열심히 참여해 주신 분들에게도 '강의를 천천히 말없이 곱씹을 자유’를 빼앗는 것 아닌가.
각박한 세상에서 문학과 심리학, 철학과 예술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늦은 밤에도 인문학 강연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에게 “이 강의를 숫자로 판단하라”는 질문은
강연의 본래 취지에도 어긋난다.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자유로이 헤엄쳐야 할 독자들을 흑백의 '판단’으로 가두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렇듯 '긍정이냐 부정이냐’식의 '판단’을 재촉하고, 우리
삶에 필요한 질문도, 해답도 직접 찾아가는 진정한 '사유’의 물꼬를 차단해 버리는 행정편의주의는 곳곳에 만연해 있다. '대학평가’라는 명목으로 모든 대학에 일률적으로 순위를 매기고, '업무평가’라는 명분으로 개개인의 다채로운 개성을 말살해 버리는 '판단’의 성급함은 '사유’의
과정 자체를 향유하는 인간 정신의 탐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부산이나 광주까지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 두세 시간 강의한 뒤 '오늘도 무사히 해냈구나’ 하는
안도감에 뿌듯해지다가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5지선다형 강의평가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평생 저런 숫자와 ○X 식 판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바로 저런 판단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판단’의 본질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수동적 리액션이라면, '사유’의 본질은 누가 나에게 꼭 대답을 바라지 않는 순간에도 나만의
질문을 만들고 나만의 해답을 천천히 찾아가는 과정의 적극성에 있다. 즉 판단의 본질이 수동적 리액션이라면, 사유의 본질은 창조적 액션이다. 무지갯빛 스펙트럼으로 자유로이 사유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바로 판단의 조급함이다.
무언가의 자유가 침해당할 때 비로소 그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데, 우리에게 자꾸 '판단’을 강요하는 사회를 돌아보니 이제야 '사유’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진다.
강의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글쓰기의 비결’인데, 나는 내 글쓰기의 진정한 비결이 '판단을 최대한 미루고, 사유를 최대한 복잡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주어진 질문지에 '예스/노’로 대답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소중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 만드는 사유의
힘’을 믿는다.
DA 300
나는 쉽게 판단 내리지 않고 사유의 실마리를 끝까지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어떤 강의를 들어도, 어떤 책을 읽어도 그것이 내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진정 전달되기까지, 어찌
보면 지긋지긋하게 기나긴 그 과정을 즐기고 싶어 한다. 단순히 인내하거나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느려터진
사유의 과정 자체를 즐긴다. 판단의 날렵함이 아니라 사유의 느린 되새김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재빠르게 결론 내리고 확실한 답이 있는 공부만 추구했다면 이런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판단 내리지 않고 사유의 풀잎사귀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면, 그저 풀잎에 불과하던 그 사유의 잎사귀가
어느 순간 천상의 약초처럼,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한 인생의 묘약처럼 그야말로 눈부시게 마음속 그늘을
환하게 비춰줄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글쓰기의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흑백의 판단을 넘어 무지갯빛 사유로 도약하는 순간, 우리는 각자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 인간 정신의 빛나는 클라이맥스와 만날 수 있다.
정여울 작가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흑백의 '판단’을 넘어 무지갯빛 '사유’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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