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언자연(希言自然)
위의 '희언자연'은 노자『도덕경』23장의 시작 부분이다.
춘추전국시대 사람이라는 것과 이름 정도 알려지고
생몰년대 조차 설이 난무한 노자는 수천년 전에
이미 오늘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글을 남겼다.
현재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여러 삶의 가치 또는 방식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그 이면을 곱씹어 보게 만드는 전복적 어록들이
수두룩하다. 한 줄 읽고 먼 산 바라보고 또 한 줄 읽노라면
과연 우리의 사유는 시간의 누적으로 참다움에 가 닿았는지 묻게 된다.
『도덕경』은 쓰여진 글자 들의 현묘(玄妙)한 부분이 많기도 하고
판본도 다양하고 주석가들의 주도 제각각이라 해석도 그러하다.
그래서 '희언자연'도
'<아무 맛이 없고>들리지 않는 말이 자연<에 대한>지극한 말이다.'
'말을 아끼는 것이 자연의 도이다'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다.'
등으로 번역 되는데 위는 순서대로 왕필, 하상공, 최진석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 번역 모두 뭔가 노자가 하려는 말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노자는 도(道)의 모습 또는 속성에 대하여 '이(夷), 희(希), 미(微)'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희언'도 말의 많고 적음보다는 듣는자의 '자발성을 찾아
스스로 있게' 돕는 '정제된 道다운 언어'여야 할 것이다. 최진석은 희언을
'언어 체계로 되어 있지 않다'고 저술에서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 말에 동조하고 싶다.
지금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있나?
『장자』에서 포정의 칼 같은 말 또는 노자의 말이 아닌 말, 희언으로
내 말을 삼는다면 나의 지금들은 어떻게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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