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 L’Etranger 『이방인』 –알베르 까뮈- 김화영
옮김, 민음사 p.9]
지금은 전보라는 통신 수단이 안쓰인지 오래지만 위와 같은 내용의 문자를 지금 내가 받는다면을 가정해본다.
특히 오늘 '엄마'라는 단어가 내게 온 것은 어젯밤 꿈에 등장한 어머니의 모습 때문이리라.
유난히 엄마의 방에서 느껴졌던 온기를 지금도 내 피부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온기는 따뜻함이라기보다는 뭔가 습함이 있는 후덥지근함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출근길에 안부 전화로 간단히 그 습함을 날리려 했었다.
다행히 밝은 목소리의 엄마를 들으며 괜히 예정에도 없었던 추석 연휴 여행을 제안해본다.
뻔히 안가신다고 할 것을 알기에...(웃음)
어느 특정 시간이 되면 아직 생전에 계신 나의 부모님과의 이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때 나는 뫼르소처럼 '아마 어제 였는지도 모르겠다' 와 같이 그 사실에 대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다른 부분에서 그는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있는 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단순히 연명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뫼르소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 살고 공동체의 진정한 어른으로 자리매김 하며 잘 늙어 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 죽음!
그 앞에 내 육신을 하나의 망설임 없이 내어줄 수 있는 '비움'의 용기는 어디에서 얻어질 수 있을까?
부모님을 생각하며 애잔함으로 나의 늙어감을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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