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상영된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영화
『세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나는 두 번 봤다.
그런데 두 번 다 아래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을 흘렸다.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저서 『밝은방』에서
위와 같이 폐부를 화살처럼 관통하는 어떤 경험을 라틴어 어원의 'punctum’이라며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스투디움(studium)인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연구'를 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애정, 열정적이지만 특별히 격렬하지 않은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바로 스투디움을 통해 나는 많은 사진 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내가
그것들을 정치적 증언들로 받아들이든, 그것들을 좋은 역사적인 그림들로 감상하든 말이다. 왜냐하면 바로 교양적으로(이 함축 의미는 스투디움에 존재한다)나는 태도, 표정, 몸짓, 배경, 행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트리러(혹은 그것에 박자를 넣으러)온다. 이번에는 (내가 내 최고의 의식을 스투디움의 영역에 부여하는 것과는
달리)그것을 찾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것이 장면으로부터
화살처럼 나와 나를 관통한다.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러한 상처, 찔린
자국, 흔적을 지칭하는 낱말이 라틴어에 존재한다. (중략) 따라서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또한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며━또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스투디움의 세계만이
이 삶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고 질주하는 시간을 영위한다.
그곳에도 열정과 정의와 공의가 다 녹아 있으므로.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것만이 다인가?’라는 뜬금없는 회의가 올라오며
답도 없는 우울감이 치솟을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인간 모두가 느낄 수는 없다고 본다.
아주 적은 일부의 사람들이 이런 감정과 마주할 때,
그때를 나는 집중하고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지점이 나만이 풀어낼 수 있는
내 고유의 부호가 있는 포인트로 보기 때문이다.
위의 내 경험도 남겨진 시간 안에서 부단히 성찰하며
통합해야 하는 나만의 푼크툼일 것이다.
각자의 푼크툼을 찾기 위하여 어쩌면 이 영화의 괴생물체처럼
모든 피부의 비늘로 숨을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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