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학 l'egologie
'동일자'우위의 철학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는 물론 '타자와의 관계'까지도 '자기 존재와의 관계'로 환원함으로써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와의 관계'조차 '자아와의 관계'로 환원함으로써 '타자'를 '다른 자아alter-ego'로 둔갑시켜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서양의 철학 전통을 레비나스는 '자아학 l'egologie'이라고 규정한다. '자아'가 '타자'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이유는 '타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어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욕구를 충족시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전체성'을 추구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아'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힘이 곧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존재론적, 철학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에서
위에서 '동일자 우위 철학'의 폭력성에 대한 부분은 나를 망치로 한 대 때리는 느낌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철학자인 레비나스다운 해석이면서도
이는 내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시대인 요즘 세대간, 계층간, 젠더간의 사회적 큰 테두리로 가면 오히려 쉽다.
하지만 미세하게 내 개인으로 소통을 들여와 보면 그다지 자신이 없다.
'나'라는 자신과 '너'라는 타자는 무수히 만남을 반복하며 내 시간을 채우고 있다.
내 시간이라서 내 안의 너는 나다운 것만 내가 취급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안다.
나답지 않은 너는 이미 내 환경안에는 없다.
수십년의 학교 교육에서 이후는 여러 책에서 내동일성 찾기를 해온지 몇 십년째이다.
그동안 '관계'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얼굴을 두었던 수 없는 타자들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동안 얼마나 맥없이 미끌어져 나가야만 했을까?
깨지지 않는 나라는 본질, 원형, 동일성 집합체 등은 언제까지 이렇게 견고해서
내 앞의 절대 타자를 훼손하고 있을 것인가?
내가 천착했던 동양철학의 '무無'는 너무도 쉽게 그 방법을 말해주는 듯 하지만
내 시간의 환경에서는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겠다.
윤리라는 개념도 가져오지 말고 그저 내 식구들의 이야기라도 '나' 없이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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